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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독서

불량사전 2012. 11. 20. 16:34

목차

    생각하는 독서

    독서는 타인에게 자신의 생각을 떠넘기는 행위이다.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타인이 밟았던 생각의 과정을 더듬는 데 지나지 않는다. 글씨 쓰기 연습을 하는 학생이 선생이 연필로 그려준 선을 붓으로 따라가는 것과 비슷하다. 때문에 독서는 사물을 고찰하는 데 필요한 고통이 수반되지 않는다. 스스로 사색하는 작업을 중지하고, 독서로 정신의 자리를 옮길 때 우리의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은 이 같은 고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서만으로는 작가가 어떤 사상에 도달하기까지 힘들게 수고했던 운동량을 소화할 수 없다. 그 때문에 거의 하루 종일 독서로 시간을 보내는 근면한 사람일수록 조금씩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게 된다. 항상 탈 것에 의존하면 마침내 걸어다니는 힘을 잃어버리는 현상과 비슷하다. 그런데 이 것이야말로 대다수 학자들의 실상이다. 그들은 지나친 다독의 결과 바보가 된 인간들이다. 틈만 있으면 책을 손에 드는 생활을 반복하다가 결국 정신을 불구가 되었고, 고유한 사색은 폐기처분되었다.

    머리 대신 손이 필요한 막노동에 종사하더라도 학자처럼 정신적인 환자는 되지 않는다. 육신의 노동은 우리에게 생각의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용수철에 어떤 물체를 올려놓고 계속 압력을 가하면 마침내 탄력을 잃듯이 정신도 타인의 사상에 의해 항상 억눌리다 보면 결국 탄력을 잃고 만다. 음식을 지나치에 많이 먹으면 위장이 병든다.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음식을 너무 많이 섭취하게 되면 영양 과잉에 의해 질식할 수 있다.

    많이 읽을수록 책의 내용은 정신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즉 우리의 정신은 칠판과 같다. 그러므로 반복적으로 쏟아지는 내용을 저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해진 양만큼 알맞게 읽은 책은 분명 독자의 것으로 남는다. 음식은 종류가 아니라 소화시킬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양분이 될수도 있고, 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항상 읽기만 하고, 읽은 내용을 생각하지 않으면 대부분 잊어버리게 된다. 정신적인 음식물일지라도 보통 음식과 다른 점은 없으며, 섭취한 양 중 50분의 1 정도만 영양분으로 남는다. 나머지는 증발 작용 및 호흡과 그밖의 활동을 통해 사라져버린다.

    독서의 첫 번째 특징은 모래에 남겨진 발자국과 같다는 점이다. 즉 발자국은 보이지만, 그 발자국의 주인이 과연 그 길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무엇이 보이는가를 확인하는 일이다.

    -쇼펜하우어 『문장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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