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역사는 그저 이야기 묶음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오늘을 사는 인간의 삶이 과거로부터 전해진 수많은 유산들 위에서 영위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역사 공부를 하면서 얻게 되는 첫째 성취는 바로 이것입니다.역사는 인간의 기억에서 시작됩니다. 그 기억이 가능하려면 일단 역사적 상황 속으로 들어가 그것과 일체가 되면서도 동시에 그것에 대해서 반성적인 태도를 취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서 한 걸음 물러나 과연 그 사태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것의 의미는 어떠한지 등을 따져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색을 거듭하면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에 대해서도 '역사적으로' 생각해보는 훈련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
사태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려면 조건과 원인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조건'은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를 위한 변명』(한길사, 2000) 에서 취한 개념입니다. 그에 따르면 '조건'은 "약간 특수한 것이긴 하지만 어떤 항구성을 지니고 있는 선행 여견"이며, '원인'이라는 말은 "그러한 선행여건, 즉 사건을 낳는 각종 힘 가운데서 이른바 차별적 요소를 드러내는 선행 여건"에 부여됩니다. 그런데 이 구별은 조금 모호한 것이므로 우리는 '시대의 바탕에 놓여있는 물질적 환경과 경제적 생산의 구조, 장기 지속적 흐름'등을 조건으로 규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p.438 『역사 고전 강의』
자연과학은 천재적인 과학자들이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생겨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17세기 유럽의 과학혁명을 살펴볼 때는 기본적으로 과학에 관한 세 가지 관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첫째, 과학은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생겨납니다.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든 것은 고려인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출판문화를 가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금속활자라는 기술과, 책이 많이 출판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앞선 과학기술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사회적으로 유용한 결과들을 만들어 내놓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결과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또 다른 사회적 제도와 집단의 뒷받침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과학자 역시 복잡한 사회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행위자임을 항상 고려해야 합니다. 과학..
한국에서 많이 읽힌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는 카이사르를 다루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인물이라고는 하나 그 찬양의 정도는 심각한 수준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는 시오노 나나미의 책이 어떤 관점에서 쓰인 것인지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역사 책을 읽으며 승리자의 편에 서서 자신이 그들과 한 편인양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우리처럼 식민 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는 나라의 사람들이 『갈리아 원정기』를 읽으면서 카이사르의 편을 들며 즐거워하는 것은 정상적인 상태라 하기 어렵습니다. 억압받고 고통받는 피지배 민족들에게 안쓰러운 마음을 가져야 정상이지 식민지를 착취했던 제국의 반성 없는 후손처럼 굴면 곤란하겠습니다.p.160 『역사 고전 강의』
세나투스(원로원)와 포풀루스(시민/하층민)의 투쟁은, 토지 문제와 그것에 근거한 재산권이 근본적으로 개혁되는 사회혁명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내전의 세기'는 포풀루스의 불만을 흡수해서 자신의 세력을 키운 일인자의 시대로 귀결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사회혁명이 아니라 정치권 내부의 권력투쟁이 전개된 것입니다. 어떤 사회에서나 계층 간의 갈등이 극단적으로 일어나는 시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갈등이 근본적인 사회 개혁으로 이어져 사회의 저변을 바꾸지 못하고 몇몇 지도자들 아래 대중이 몰려들어 그들의 세력을 키워 주고 그것이 유력한 지도자들 사이의 정치적 권력투쟁으로 이어지면, 수많은 대중들은 결국 사회의 주체가 아니라 장기판의 졸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맙니다.p.155 『역사 고전 강의』